한 때 유럽인들은 비유럽 문명의 강대국들을 '병든 거인'이란 멸칭으로 부르곤 했습니다. 한때 유럽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오스만투르크 제국이나 당대 가장 부유했던 중국 청나라에게 '병든 거인'이란 이름이 붙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병든 거인'이란 이름에 가장 적합한 곳은 오히려 유럽이 아닐까 싶은데요.
국가 재정, 군사력, 산업 경쟁력 측면에서 미국이나 중국은 물론 신흥 강국들에도 뒤처져 좀처럼 따라잡기 어려운 처지가 됐기 때문입니다. 특히 유럽의 산업은 중국의 저가 공세에 밀려 경쟁력을 잃고 있다는 게 우리네 상식입니다.
그런데 뜻밖에 유럽의 산업이 나름 괜찮다는 시각이 나왔습니다.
영국 시사주간지 디 이코노미스트는 27일 "유럽 제조업체들이 타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결코 회복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것은 아니다"라고 파악했습니다.
“희망적인 이야기도 들어보시겠습니까?”
유럽 화학기업들의 로비단체인 세픽(Cefic)을 이끄는 마르코 멘싱크가 묻습니다. 멘싱크는 먼저 암울한 현실부터 진단합니다. 높은 에너지 가격과 중국과의 경쟁으로 공장이 문을 닫고 일자리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추가적인 산업 통합은 “불가피”합니다.
그가 말하는 희망은 브뤼셀 사무실의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전기 케이블 단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케이블은 중국의 거대 기업인 오리엔트 케이블(Orient Cable)이 만든 것입니다. 하지만 전선을 감싸는 절연용 폴리머는 오스트리아의 부루게 인터내셔널(Bouruge International)이 생산합니다. 멘싱크는 중국을 방문할 때마다 업계 거물들이 이 유럽 기업에 대해 끊임없이 묻는다고 말합니다. 아직까지 중국 기업들이 만들지 못하는 케이블의 유일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화학기업만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유럽연합(EU)의 산업 전반이 상당한 압박을 받고 있습니다. 9월 21일 폭스바겐은 구조조정 계획을 더욱 강화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폭스바겐은 올해 중국 경쟁업체들의 공세로 실적 전망을 하향 조정한 유럽 자동차회사 5곳 가운데 하나입니다. EU의 행정부 역할을 하는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도 우려하고 있습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9월 16일 국정연설에서 중국과의 무역적자가 “임계점(tipping point)”에 이르렀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유럽의 산업 지형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계 최고 수준의 폴리머 외에도 희망의 빛줄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광범위한 탈산업화에 대한 우려가 쏟아지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피해가 일부 산업에 국한돼 있습니다. 유럽 산업의 상당 부분은 여전히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위협을 받고 있는 기업들도 새로운, 훨씬 더 가혹한 현실에 적응하고 있습니다.
최근 일부 유럽 생산업체가 어려움을 겪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나는 에너지입니다. 유럽의 에너지 가격은 오랫동안 미국이나 중국보다 높았습니다. 보조금을 적용하기 전 기준으로 프랑스와 독일의 산업용 전력 가격은 미국이나 중국의 약 두 배에 달합니다. 우크라이나와 이란에서 벌어진 전쟁은 에너지 비용을 더욱 끌어올렸습니다.
다른 하나는 중국입니다. 중국의 산업정책과 혁신, 품질 향상은 철강 제품부터 전기차(EV)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제품의 생산을 크게 늘렸습니다. 중국에서는 막대한 공급량이 국내 수요의 둔화와 겹치면서 일부 과잉 생산 물량이 해외로 흘러나가고 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와 일부 중국산 제품에 대한 수입 금지 조치로 인해 유럽은 중국 수출업체들의 주요 공략 대상이 됐습니다.

한편 유럽 기업들은 한때 규모가 크고 빠르게 성장했으며 높은 수익을 안겨주던 중국 시장에서 제품을 판매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유럽 기업들은 중국 현지 공장과 공급망을 활용하는 경우가 많아 유럽에서 중국으로 수출하는 물량이 제한적입니다. 그 결과 중국의 대EU 상품 무역흑자는 2019년 이후 두 배 이상 늘어나 4200억 달러에 이르렀습니다.
특히 자동차 산업이 큰 타격을 받고 있습니다. 과거 중국은 유럽 자동차업체들의 주요 수익원이었지만, 이제는 중국 기업들이 유럽 업체들보다 훨씬 빠르고 저렴하게 새로운 차량을 시장에 내놓고 있습니다. EU 내 자동차 생산량은 코로나19 이전 수준보다 17% 감소했습니다. 사용되지 않는 생산설비는 중국 경쟁업체에 임대되고 있습니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자동차 산업은 EU 전체 일자리의 6%를 차지합니다. 정책입안자들이 우려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이러한 압박은 결국 투자에 투입할 수 있는 현금을 줄이고, EU 기업들이 경쟁에서 더욱 뒤처질 위험을 키웁니다. 컨설팅업체 맥킨지가 6개 제조업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2024년 유럽은 제약, 전자, 화학 등 3개 산업에서 미국과 중국보다 적은 투자를 유치했습니다. 가장 많은 투자를 유치한 산업은 하나도 없었습니다(차트 1 참조). 다만 이는 유럽 기업들이 더 저렴한 에너지를 확보하거나 관세를 피하기 위해 유럽 밖에 투자한 영향도 일부 반영합니다.
상황이 모두 암울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유럽 산업 전체가 쇠퇴할 운명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어려움은 국가별·산업별로 상당히 집중돼 있습니다.
도이체방크의 에릭 하이만은 EU 전체에서 제조업이 전체 총부가가치(GVA)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최근 몇 년 동안 약 16% 수준을 꾸준히 유지해왔다고 지적합니다. 독일과 이탈리아 등 일부 국가에서는 그 비중이 소폭 하락했습니다.
고용 지표에서도 비슷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2023년 1분기 이후 EU 제조업 고용은 약 2% 감소해 2800만 명이 됐습니다. 이 감소분의 5분의 4는 독일 한 나라에서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전체 일자리 수는 줄어들고 있지만, 엔지니어와 기술자 같은 고숙련 직종의 일자리는 2023년 초 이후 오히려 7% 증가했습니다.
호황을 누리는 산업도 있습니다. 제약, 항공우주, 전자산업의 고용은 2023년 초 이후 증가했습니다. 인공지능 붐은 프랑스의 슈나이더 일렉트릭, 독일의 지멘스, 이탈리아의 프리즈미안에도 혜택을 주고 있습니다. 이들 기업은 모두 데이터센터가 끊임없이 가동될 수 있도록 하는 각종 장비를 생산합니다.
독일의 라인메탈과 이탈리아의 레오나르도 같은 방산업체들도 국방예산이 늘어나면서 생산량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중국으로부터의 위협 역시 무역 데이터가 보여주듯 특정 산업에 집중돼 있습니다. 스위스의 경영대학원인 IMD의 사이먼 에베넷은 값싼 중국산 제품이 물밀듯 유럽으로 들어와 유럽 생산업체들을 쓸어버리고 있다는 통념은 과장됐다고 주장합니다.
에베넷의 분석에 따르면 2023년 이후 EU의 중국산 수입 물량은 중국 이외의 국가에서 동일한 제품을 수입한 물량보다 조금 더 빠르게 증가했을 뿐입니다(차트 2 참조). 유럽은 중국에서만 더 많은 제품을 수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더 많은 제품을 수입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중국으로부터의 수입이 급증한 품목도 있습니다. 에베넷은 또 다른 분석에서 독일의 중국산 수입품 가운데 상위 100여 개 품목을 살펴봤습니다. 그는 2023년 이후 수입 물량이 25% 이상 증가하면서 가격은 10% 이상 하락한 품목을 추려냈습니다. 100여 개 품목 가운데 이 두 가지 기준을 모두 충족한 것은 11개였습니다.
이 11개 품목 대부분에서는 전기차(EV), 가구, 일부 화학제품 등이 포함되며 중국산 제품이 유럽산 제품과 정면으로 경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값싼 중국산 제품이 유럽 산업의 상당 부분을 가격 경쟁으로 몰아붙이고 있다는 주장은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입니다.
더욱이 중국산 수입품 가운데 일부는 유럽 기업에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2023년 이후 중국의 전 세계 수출 증가에 가장 크게 기여한 100개 품목을 보면, 증가분의 4분의 3은 전기차 배터리와 로봇 팔 같은 부품 및 중간재에서 나왔습니다. 이런 제품은 유사한 장비를 만드는 기업에는 위협이 됩니다. 하지만 이를 구매하는 유럽 기업에는 생산비용을 낮춰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유럽중앙은행(ECB)의 한 연구에 따르면 2000년부터 2022년까지 중국산 중간재 수입에 노출된 산업에서는 산업생산이 연평균 0.6%포인트 더 빠르게 증가했습니다. 반면 중국산 완제품 수입에 노출된 산업에서는 산업생산 증가율이 약 1%포인트 하락했습니다.
여러 측면에서 유럽 기업들은 변화한 환경에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스페인에서는 풍부한 태양광 발전 덕분에 에너지 가격이 비교적 낮게 유지되는 등 여러 요인에 힘입어, 유럽 기업들의 연간 투자액이 2021~2025년에는 그 이전 5년과 비교해 두 배로 늘었습니다.
투자은행 모건스탠리의 한 보고서는 유럽 기업들이 2022년보다 다가오는 겨울을 “훨씬 더 잘 대비하고 있다”고 평가합니다. 당시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러시아의 가스 공급이 끊겼습니다. 일부 기업은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조치를 시행하거나 자체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재생에너지 발전설비를 더 많이 설치했습니다. 다른 기업들은 금융 헤지를 확대하고 있습니다. 벨기에·프랑스계 화학기업 솔베이와 독일의 소금 생산업체 K+S는 올해 에너지 소비량의 대부분을 헤지했습니다.
EU 제조업체들은 서비스 판매도 늘리고 있습니다. 이들이 2024년에 수출한 서비스 규모는 4600억 달러로, 2년 만에 21% 증가했습니다. 덴마크의 풍력터빈 제조업체 베스타스와 독일의 항공엔진 기업 MTU 에어로 엔진스 같은 기업의 경우 이는 유지보수 계약 확대를 의미합니다.
다른 기업들은 소프트웨어를 더 많이 판매하고 있으며, 하드웨어에 소프트웨어를 결합하는 방식도 확대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거대 엔지니어링 기업 지멘스는 일찍부터 이러한 흐름을 포착해 여러 소프트웨어 기업을 인수했습니다. 자동차 제조업체 스텔란티스는 지난해 서비스 구독에서 발생한 매출이 50~60% 증가했다고 밝혔습니다. 스텔란티스의 최대 주주는 《이코노미스트》의 모회사에도 일부 지분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기업 경영자와 정책입안자들은 유럽 산업의 미래가 소프트웨어, 특히 인공지능(AI)에 달려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지멘스의 회장인 짐 하게만 스나베에게 공장이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이 기술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를 다루는 보고서를 작성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독일은 이미 직원 1인당 산업용 로봇 보유 대수가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습니다. 싱가포르와 한국 다음입니다. 스웨덴과 덴마크도 크게 뒤처지지 않습니다.
AI가 유럽의 공장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면, 이는 유럽의 제조기업을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될 또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에너지 가격과 중국산 수입품은 분명 실질적인 문제이지만, 그 영향을 받는 기업은 일부에 불과합니다. 유럽은 수십 년에 걸쳐 세계적인 제조기업을 육성해온 경험이 있으며, 거대한 소비시장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유럽 제조업체들이 타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결코 회복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것은 아닙니다.
'경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미국 국채 대신 미국 주식 사는 글로벌 큰 손들, 한국의 국민연금도 큰손 (0) | 2026.10.05 |
|---|---|
| LNG 시장의 향방은? 갈수록 복잡해지는 트레이더들의 셈법 (0) | 2026.10.05 |
| 집값 떨어지나, 주택 시장 과열 해소 조짐 (0) | 2026.09.26 |
| 호주 - AI 시대의 또 하나의 허브를 꿈꾸다, 풍부한 에너지와 자원이 최대 강점 (0) | 2026.09.22 |
| 미중 정상회담이 경제협력 확대 기회될까, 기업인들이 회의적인 이유는? (0) | 2026.09.22 |